2011. 4. 9.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여덟 개 통합소 유형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여덟 개 통합소 유형들'

 거짓과 위선의 말들로 위태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부가 있다. 아내 앤은 남편과 여동생이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진실의 내막을 알지 못한다. 그녀가 이들의 관계를 눈치 채기 전까지 영화가 인물과 상황을 드러내는 방식은 자욱하게 안개 낀 날씨의 흐림 효과 같다. 인물들을 둘러싼 사건은 사실의 진위 여부가 명확한 사건 속에 있지 않다. 심증과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진실과 거짓말의 경계는 계속해서 흐려진다. 영화는 이들 사이에 출연한 그래함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통해 삼각관계 사이에 드리워진 장막을 걷혀나가는데, 그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는 이와 같은 상황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래함이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 밖으로 보이스 오버 된 앤의 고백이 들린다. 화면은 그래함과 자신의 겉돌기만 하는 결혼 생활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고백하는 앤의 상담 장면으로 전환을 반복하다가 남편 존과 여동생의 외도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세 가지 에피소드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지는 않지만 다이제시스 상에서 연대기적이며 선형적이다. 각각의 신들은 보다 큰 전개의 일부 즉 앤의 가정과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상징적인 요약을 이뤄낸다. 이것은 메츠의 ‘여덟 개 통합소 유형들’ 중 ‘에피소드 시퀀스(EPISODIC SEQUENCE)’에 해당한다. 이 에피소드 시퀀스가 보여주는 상징적인 요약은 삼각관계 안을 침투하는 그래함의 역할이 마치 직선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앤과 존 그리고 신시아 간의 은밀한 사건들을 관통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시퀀스는 앤의 상담 장면을 중심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이 겪는 혼란의 맥을 가늠하지 못하는 앤과 남편의 외도 장면이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오프닝 시퀀스는 ‘에피소드 시퀀스’임과 동시에 두 상황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전치, 대비되는 관계를 갖는 전치된 ’다이제시스적 인서트(DISPLACED DIEGETIC INSERT)'이다.
 영화에는 ‘여덟 개의 통합소 유형들’에 해당하는 또 다른 장면이 등장한다. 남편의 외도에 대한 앤의 심증이 물증과 함께 입증되며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을 영화는 ‘일상적 시퀀스’의 방식으로 나타낸다. 청소도중 침실에서 여동생의 귀걸이를 발견한 앤은 충격을 받은 채로 갑작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집을 뛰쳐나간다. 그녀가 차에 타 혼란스러운 듯 귀를 틀어막고 있다가 문 밖으로 나왔을 때 공간은 처음과 전혀 다른 곳으로 바뀌어있다. 차 안에 탔다 내리는 짧은 액션에 인물의 이동을 비롯한 공간의 변화가 일절 생략되어버린 것이다. ‘일상적 시퀀스’는 선형적이지만 불연속적인 특징을 갖는다. 연속적인 행위를 전개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세부와 죽은 시간을 삭제하며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이 같은 기능이 이 영화 속에서 단순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앤이 처음으로 보여주는 돌발행동에 대한 강조, 목적지가 문제의 당사자인 남편이 아니라 그래함이라는 점, 시공간을 압도할 정도의 심적 충격에 대한 영화적 묘사 등을 포함한 ‘시간적 생략’이 포함된다. 기표는 불연속적인 반면 기의는 연속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일상적 시퀀스’의 특징처럼 이 돌연한 장면은 앤과 그래함의 관계를 깊숙하게 확장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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