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간의 압박
“타원형 선에 구멍이 네 개가 있군요.” 영화 초반 K의 집을 수사하던 경찰은 카펫 아래 가려져있던 정체모를 형상을 발견한다. 잠깐 동안 비춰지는 이 형상은 앞으로 K와 관객이 마주하게 될 미로 같은 공간들을 암시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부패한 권력의 억압으로 인해 자유의지를 상실한 상태로 그려진다. 여기서 K는 스스로 자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권력이 장악한 미로의 문을 여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각각의 공간이 가진 강력한 압박의 요소들은 K를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몰아넣는다.
K가 처음으로 여는 것은 법정의 문이다. 커다란 문을 힘 있게 철커덕 여는 그의 도전적인 걸음은 안으로 들어오자 빽빽하게 들어찬 군중들의 시선에 의해 뒷걸음질이 된다. 이 장면에서 K를 둘러싼 공간을 만드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공간 안에서 선형들의 조합으로 배경의 형태를 만드는 소도구의 역할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4면의 벽을 가득 채운 군중들은 전부 단상을 향해 나란한 행렬로 앉아있다. K가 직선으로 뻗은 이 행렬 사이를 가로질러 단상위로 올라서자 경직된 직선들의 모서리는 일제히 한 점을 향해 위협적으로 집중되고 있다.
다음으로 여는 문은 변호사의 저택이다. 겹겹의 문들로 이어진 저택 안의 공간 어디에서건 변호사의 강압적인 목소리가 불쑥 닿는다. 변호사의 조력자 레니는 의심과 불신 혹은 아직 진실에 대한 희망의 눈빛을 지닌 K에게 유혹의 신호를 보내며 그를 이끌고 또 다른 문 안으로 들어간다. 판사의 초상화와 책 더미들로 둘러싸인 은밀한 공간에서 레니와 K를 비추는 장면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런데 서로를 껴안고 누워있는 둘의 움직임은 불편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이들이 미끄러지는 책 더미들 사이를 비집으며 들어갈 때 공간은 마치 서서히 목표물을 옥죄는 거미줄처럼 느껴진다.
<심판>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그려지는 공간은 화가 티토렐로의 집이다. K는 건물 문을 열고 좁은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수직으로 솟은 원형계단 위로 쫓긴다. 계단의 철골 사다리와 뾰족한 난간들이 그리는 직선과 대각선, 구부러진 선 등은 K를 끌어올리는 강압적인 힘이다. 새장처럼 꽉 막힌 티토렐리의 집 안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배경이었던 날선 그림들이 세트로 재현되어있는 듯하다. 나무판자들 사이로 스며드는 날카로운 빛이 어두운 그림자를 가를 때, 사각의 액자틀과 일그러진 가구들이 머리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을 때 K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낀다. 그리고 그가 필사적으로 나가는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보여 지는 것은 다시 법정 안이다. 앞서 등장했던 타원형의 형상은 시작과 끝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던 공간들이 베일을 벗은 이때 떠올릴 수 있는 영화의 전체적인 이미지이다. 개인들을 장악하고 철저하게 이용하려한 ‘그들의’ 거대한 세계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억압된 구조인지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심판>의 미로를 부패한 권력의 세계로 본다면 영화 속 비현실적 공간들에는 1960년대 혼란스런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진실을 지독하게 감추고 있는 이 비현실적이고 끔찍한 공간들은 핵과 냉전에 대한 불안으로 얼룩져있던 비관적인 현실의 모습이기도하다. 억압적 세계로부터 압도당하는 가운데 개인들은 하나같이 진실을 마주하려는 태도를 포기해버리거나 권력의 개가 되어간다. 영화의 마지막, 정작 문제의 미로가 아닌 그와 동떨어진 곳을 폭파시키며 사라지는 K의 모습은 영화가 끝내 드러내려는 비관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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